이동 삭제 역사 ACL 마이클 조던/생애 (r2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 그러나 한창 새 시즌 준비로 바빴던 1993년 8월, 조던에게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그의 멘토이자 아버지인 제임스 조던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고속도로 노상에서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소식은 검거 직후 제임스 조던의 금품을 노리고 그를 살해했다고 자백한 이 범인들이 바로 다름아닌 마이클 조던의 열렬한 광팬이었고, 그들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바로 그의 신발을 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범인이 마이클 조던의 아버지를 일부러 노리고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죽여놓고 보니 제임스 조던이었던 것.] 이 비극적인 운명의 장난 앞에서 조던은 더욱 큰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일 때문에 조던은 크게 상심하여 농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최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한 그에게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조던의 제2의 인생으로 결정한 것은 '''야구'''였다. 원래 유년기에 농구와 야구를 두고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을 정도였고, 사별한 아버지 역시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조던에게 야구선수로서 소질이 있다고 자주 언급했다. 1994년 2월 15일, 등번호 45번과 함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프링캠프]] 훈련에 참가함으로써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필 화이트삭스였던 이유는, 불스의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table width=300><table bordercolor=#000000><#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insidesocal.com/i-17c88e35d55c9abddf91dbac0e136357-0314_large.jpg|width=100%]]}}} || ||<#000000><:> {{{#ffffff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br]"짐 싸, 마이클!"편 표지.''' [* 조던은 이때 실린 비난기사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이후 SI표지 모델로 서는것을 거부했다. 이후 SI의 50주년 기념커버는 수락했지만 특집 인터뷰는 거절했다고.] }}} || 어쨌든, 마이너리그에서 뛰게 된 야구선수 조던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250명의 기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조던이 야구에서는 엄연한 루키[* 그 이전에 조던이 야구에 힘을 쏟은 건 17살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농구 은퇴를 선언하고 다시 야구를 시작한 1993년 여름에 그의 나이는 31살이었다.]임에도 불구하고 더 낮은 수준이 아닌 더블A팀부터 시작하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에 따르면 더블A보다 아래의 팀들에 조던을 넣으려 해도 그 팀들이 가진 구장에선 앞서 말한 규모의 취재진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스프링캠프 훈련 후 화이트삭스 산하의 더블A팀인 버밍햄 베론스로 배정됐다. 여담인데 당시 베론스 감독이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듣보잡]] 감독이었지만 알다시피 훗날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이 되어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버리며 전설이 된 그 감독이다. 조던의 마이너리그 데뷔전에 1만여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마이너리그 치고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경기성적은 좋질 못했다. 첫 경기에서 삼진 2개와 파울플라이 1개를 기록했고, 다음 경기에서도 여전히 안타는 없었고 수비 에러까지 나왔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저조한 성적이 계속되자 "에어 조던이 아니라, 에러 조던", "짐 싸, 마이클!" 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농구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조던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썼다.[* 매일 200~800회의 스윙연습을 했다고 한다.] 노력의 결과인지 4월에는 11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고, [[http://youtu.be/r0bXG55nCP8|7월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시즌의 마지막 3주 동안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을 마친 뒤 애리조나에서 가을 리그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타율은 .251로 올라갔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 기자로, 조던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샘 스미스는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을 인용하며 조던이 다음 시즌에 메이저로 콜업될 확률이 높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사실 성적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기대는 해봄직 했지만, 당장의 마이너리그에서의 성적은 안 좋았고, 현실적으로 연령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했으므로 일반적인 유망주라면 메이저 리그 진출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던은 엄청난 네이밍덕에 벤치에만 앉아있어도 구단의 흥행에 충분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마케팅 특수를 생각하면... 또한 1차원적으로 나이만 보자면 만 31세의 유망주라 발전 가능성이 낮아보이지만, 저 성적은 그가 야구를 다시 시작한지 '''1년도 안되어 낸 성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발전 속도가 상당하다고 보는게 맞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나이라 리스크가 크긴 했지만. 포인트는 그가 다른 31세 마이너 유망주와 달랐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이너에서 31세 유망주는 마이너에서 10년 정도 구르고 저 정도 성적이기에 발전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조던은 마이너에서 1년 뛰고 저 정도 성적이기에 실력향상 속도 면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것이고 메이저 팀들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단순히 마케팅 특수 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히 흥행 때문에 메이저 팀들이 관심을 보인 거라면 '''왜 그의 인지도가 절정이었던 농구에서 은퇴 직후에 그와 계약한 화이트삭스가 그를 메이저에서 데뷔시키지 않았겠는가?'''[* 사실 오클랜드 As가 조던이 데뷔한 직후에 메이저리그 로스터 자리를 오퍼하긴 했다. [[https://www.mlb.com/news/michael-jordan-offered-spot-with-1994-athletics|#]] 이건 말 그대로 조던 특수만을 노린 계약인데,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던 조던은 이를 거부했고 화이트삭스는 마이너에서부터 그가 과정을 밟아가게 했다.] 일단 메이저급 실력은 지녀야 마케팅 특수고 뭐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넣을 수 있는 것이고, 당시 가을 리그 성적을 보고서야 메이저 팀들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이들이 그의 성장세를 보고 "메이저급 실력을 지닐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당시 [[https://www.nba.com/bulls/news/jordanhof_yeareleven_090908.html|샘 스미스의 글]]을 보면 파업사태가 터지기 전 화이트삭스는 조던을 트리플 A로 올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케팅 특수를 노리고 무리해서 메이저로 보내지 않은 시카고 입장에서도, 조던은 단계별로 착실히 성장 중인 유망주였던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짐싸 마이클(Bag it Michael)" 기사를 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Steven Wulf기자는[* 조던은 라스트 댄스에서 이 기사에 대해 열받았던 이유가, SI가 자신에게 인터뷰도 하지 않고 지 맘대로 기사를 썼다는 것을 들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면 될 것을 속된 말로 뇌피셜로만 기사를 썼다는 것.] ESPN에 2019년에 조던의 야구 커리어에 대해 자세히 짚어보는 기사를 올리면서 [[https://www.espn.com/mlb/story/_/id/26449232/the-true-story-michael-jordan-brief-promising-baseball-career|#]] 사람들이 조던의 야구 커리어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도 잘못 생각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기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울프는 조던의 초반 실력을 보고 신랄하게 까는 기사를 썼으나, 8월달에 조던의 경기를 직접 보러 간 후 그의 스윙과 배트 스피드가 메이저급이며 밤 늦게까지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정정기사를 썼으나 SI의 편집자들이 이걸 킬했다고 한다.[* 사실 이 정정기사가 정상적으로 발행됐으면 조던의 야구실력에 대한 오해가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예나 지금이나 자극적인 얘기를 원한다. "영웅의 추락"이란 소재가 "농구영웅이 노력해서 그럭저럭 쓸만한 프로 야구선수가 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눈길을 끌기 때문.] 또한 리그 최하위권이던 타율 .202에 묻히는 부분인데 그는 팀 내 3위에 해당하는 51타점과 '''리그 전체 5위'''에 해당하는 30도루도 기록했다. 물론 18도루사를 기록한 부분을 생각하면 훌륭한 성적은 아니다. 성공률이 62.5%인데, 세이버매트릭스에서는 도루 성공률 76%를 넘기지 못하면 팀에 마이너스라고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도루의 가치는 성공 시 +0.2, 실패 시 -0.4로 간주하며 도루 성공률이 64% 미만이면 음수 가치, 64% 이상이면 그나마 양수이기는 하나 최소 70%는 넘겨야 도루를 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 항목에서 언급되다시피 '''시즌 전체의 모습'''을 종합하면 별로 좋은 성적은 아니다. 사실 시즌 전체로 보면 .202에 불과한 타율이지만, 조던은 꾸준히 실력이 늘어 마지막 달에는 2할6푼 타율, 특히 마지막 40타석에서 12안타를 기록(3할)했으며, 더블A보다 살짝 높은 가을리그에서도 .251의 타율을 기록했다. 당시 가을리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리그 수준에 대해 오해들이 있지만 당시 기사들을 보면 [[https://miscbaseball.wordpress.com/2013/05/08/michael-jordan-in-the-arizona-fall-league-in-1994/|#]] 아리조나 가을 리그에선 더블A~트리플A급 선수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1994년에 트리플 A에서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 상"을 받은 '''[[데릭 지터]]'''나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노마 가르시아파라]], [[제이슨 지암비]] 같은 톱급 유망주들도 있었다. 특히 가르시아파라는 조던과 같은 팀인 스콧스데일 스코피언스 소속이었으며, 또한 지터는 메이저로 콜업되기 직전이었다. 이 가을 리그에서 활약이 특히나 중요한 것이, 만약에 조던이 후반 40타석에서, 그것도 시즌 내내 봐온 더블 A에서 3할 기록한 것만 본다면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다"고 치워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더블 A와 트리플 A급 선수들이 주로 있는 가을 리그에서 평균 2할5푼의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은 이게 플루크 수준이 아니라 실제 실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상시 상대하지 못한 선수들이 다수 있는 리그라면 상대 선수들에 익숙해져서 낸 성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애리조나 가을 리그는 보통 30경기 정도 치르기 때문에 30경기 동안 보여준 모습을 "운이 좋았다"고 폄훼하는 건 불합리하기 때문. 한 마디로 더블 A보다 수준이 더 높은 가을리그에서도 2할5푼을 기록한 것. 게다가 조던은 초반에 (투수들이 직구로 승부할 때) 13경기 연속 안타를 친 것 이후 투수들이 구종을 다양하게 던지기 시작하자 연이어 1할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실제로 5월에 1할6푼대를 기록했다가 불과 3~4달만에 2할5푼 타자가 된 것이다. 즉, 처음에는 더블A급도 아니었던 선수가 몇달만에 (그것도 야구를 그만둔지 14년만에 처음 시작하면서) 더블A에서 제법 쓸만한 선수가 된 것. 한마디로 시즌 초반엔 1할급 타자가 시즌 후반엔 3할급 타자가 된 것이다. 위 기사에서도 나오지만 조던이 아리조나 가을리그 참여 당시 리그 전체적으로 조던이 '''다음 시즌을 트리플A에서 시작할 것이란 예상이 돌았다.''' 당시 이 예상이 적힌 기사는 시카고 최대 언론매체인 시카고 트리뷴에서 나왔으며, 화이트삭스 매니저인 론 슐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나온 보도이다.[* 마이너리그에서 선수의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게 성장세다. 서두에 언급됐듯이 조던의 원래 실력은 더블A 미만, 즉 루키리그나 잘해봐야 싱글A급이었다. 근데 더 높은 수준인 더블 A에 넣어놓으니까 혼자 독하게 훈련하더니 시즌 끝날때쯤 더블A에서도 수준급 선수가 됐다. 그렇다면 그냥 더블A에서 무난히 뛰게 하는 것보다는, 수준이 더 높은 트리블A에 투입해서 얼마나 성장할지 보는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심지어 이 모든게 불과 1년만에 이뤄졌다. ''"1년만에''' 싱글A 레벨에서 트리플 A레벨로 올라가는 선수라면 굉장한 성장세다. 나이가 많이 커리어가 짧고 부상위험이 더 크다는게 걸릴 뿐. 사실 부상 위험이 크다는 것도 단순히 비슷한 나이의 선수들의 경우에 대입해 한 추측일 뿐이고, 조던은 2년차 이후 한 번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며 이후 농구로 복귀해 농구에 적합한 몸으로 몸을 바꾸는 과정+만 32~35세까지 세시즌 넘게 뛰고 경기당 40분 가까이 뛰면서도 '''단 한경기도 부상으로 결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상위험이 큰 것도 아니다. 실제로 당시 조던의 메이저행을 논하는 기사들 중에 부상위험을 언급한 기사는 없었다. 30대 중반까지의 조던은 10~15살 어린 선수들보다도 부상을 적게 당하는 선수였다.] 정리해보면 조던의 1994시즌 성적은 조던이란 이름을 떼놓고 보면 형편없는 것이 맞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던은 시즌 내내 저 성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장했다는 것. 한마디로 '''시즌 초반의 조던과 시즌 후반의 조던은 전혀 다른 선수였다.''' 시즌 초의 그는 메이저는 커녕 마이너에서도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시즌 후반의 조던은 트리플A승격을 앞두고 있는 선수였다'''는 것. [[파일:external/latimesphoto.files.wordpress.com/fa_132_jordanumpire_970.jpg|width=500]] ||<-18><#000000><:> {{{#ffffff 야구선수 기록}}} || ||<rowbgcolor=#c60c30> {{{#ffffff 연도}}} || {{{#ffffff 소속}}} || {{{#ffffff 경기}}} || {{{#ffffff 타수}}} || {{{#ffffff 타율}}} || {{{#ffffff 안타}}} || {{{#ffffff 2루타}}} || {{{#ffffff 3루타}}} || {{{#ffffff 홈런}}} || {{{#ffffff 타점}}} || {{{#ffffff 득점}}} || {{{#ffffff 도루}}} || {{{#ffffff 도루자}}} || {{{#ffffff 4사구}}} || {{{#ffffff 삼진}}} || {{{#ffffff 에러}}} || {{{#ffffff 장타율}}} || {{{#ffffff 출루율}}} || || 1994 || [[시카고 화이트삭스#s-4.2|버밍햄 배런스]] || 127 || 436 || .202 || 88 || 17 || 1 || 3 || 51 || 46 || 30 || 18 || 55 || 114 || 11 || .266 || .289 || ||||<rowbgcolor=#ffff99><:> '''[[MiLB#s-4.6|AA]] 통산'''[br](1시즌) || 127 || 436 || .202 || 88 || 17 || 1 || 3 || 51 || 46 || 30 || 18 || 55 || 114 || 11 || .266 || .289 || 이러한 측면에서 이때까지만 해도 다소 희망적인 분위기로 다음 시즌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터졌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파업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파업은 232일이나 지속됐으며 90년만에 월드시리즈조차 치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사태로 치닫고 만다. 결국 1995년 3월 5일 조던은 화이트삭스를 떠났고, 1년 26일만에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이때 조던은 단순한 파업의 피해자가 아니라 일종의 캐스팅보트를 쥔 선수이기도 했는데, 1995시즌 개막 전에 연방법원으로부터 승인된 대체선수(replacement player)의 존재 때문이었다. MLB 선수 노조가 시즌 참가를 거부하자 리그는 마이너리그 및 다른 리그 선수들을 동원해 스프링캠프와 정규 시즌을 치르려고 했고, 당연히 노조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실제로 백명이 넘는 마이너 선수들이 대체선수로 콜업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ajor_League_Baseball_replacement_players|#]] 그리고 마이너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었다. 조던은 메이저 경험이 없는 노땅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Harris Poll의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항목에서 전 종목을 통틀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고 웬만한 메이저리그 스타들은 씹어먹는 티켓파워를 자랑했다. 이 때문에 조던은 대체선수 1순위였다. 조던은 선수노조 편에 서겠다고 말하고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스프링 캠프를 이탈해버린다.[* "조던은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있는 선을 지나고 싶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구단주들이 티켓을 팔기 위한 방법인 "대체선수"로 여겨지는 걸 꺼렸다. [[http://hangtime.blogs.nba.com/2014/08/12/mlbs-worst-stoppage-in-1994-brought-jordan-back-to-his-day-job/|#]] [[http://www.nydailynews.com/sports/baseball/milestones-1994-major-league-baseball-strike-killed-article-1.2747085|"조던은 화이트삭스에 대체선수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기사도 있다.] 조던은 단순한 마이너리거 중 하나로 여겨지길 바랬지만,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운동선수였던 만큼 이는 불가능했다. 선수노조와 구단주 양측에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 마당에 조던이 원래 목표했던 것처럼 순수히 자기 실력으로 얻어낸 메이저리그 진출은 불가능해졌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대체선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뛰며 구단주들의 광고판으로 활용되거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에 동참하며 신체적 전성기를 하릴없이 보내거나. 결국 조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 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가 활약하던 시절 마이너리그는 조던을 보고자 관중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가 야구선수로 활약하면서 받은 연봉은 겨우 1만 달러였다고. 하지만 그는 배런스 구단에 당시 최고급 버스까지 사다주었는데 버스에는 바텐더 석까지 달려있고 TV만 6대나 달려있었는데 56만 달러를 주고 사와선 팀에 아예 기부해버렸다. 자기 전용비행기도 쓸 수 없고 팀원들과 함께 낡고 좁은 버스로 이동해야 하니까 빡친 조던이 아예 자기 돈으로 버스 두 대를 샀다. 한 대는 앞에서 얘기한대로 선수용이고 나머지 한 대는 바와 음식 조리실까지 갖춰진 자기 전용(....). 나중에 자기 전용버스도 야구를 그만둘 때 구단에 기부했고, 그 덕분에 한동안 배런스는 모든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꿈의 구단이었다(...). 부가설명을 하자면 NBA나 MLB 선수들은 전부 구단 전용기 혹은 팀이 전세낸 비행기를 이용하고, 이 전세/전용기는 전좌석이 일등석 자리에 TV, 코치진이 회의 할 수 있는 공간이나 선수들이 카드게임 등 사교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기종에 따라 뷔페식 식당이 있는 경우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99jNdSMXQ|1998년 당시 시카고 불스의 비행기]] NBA 선수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건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까지 가거나(이 때도 버스가 활주로까지 들어온다) 호텔에서 경기장까지 가는 짧은 거리 뿐이고, 이 버스도 당연히 거구인 NBA선수들의 덩치에 맞게 커서 226cm 거구인 숀 브래들리도 편하게 일반좌석에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 그런데 마이너리그에서는 정말 장거리 여행이 아니면 거의 무조건 버스로 이동한다. 그것도 NBA/MLB처럼 고급버스도 아닌 일반 버스... 저런 비행기만 이용하던 선수가 갑자기 장거리 버스에 적응하려니 힘들수밖에 없다. 이처럼 미국스포츠에서 메이저와 마이너의 대접 차이는 불합리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전 미국의 언론사들에 한통의 팩스가 도착한다. ||<table align=center><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d4001f><#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S15032000262g_99_20150320134203.jpg|width=100%]]}}} || ||<#d4001f><:> {{{#ffffff '''마이클 조던의 “I‘m back” 팩스 화면''' [* 사진의 출처는 ’더 스코어‘ 공식 트위터. 해당 자료는 조던의 에이전트인 데이비드 포크가 운영하는 페임사가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인데, 이를 통해 조던이 직접 밝힌 말은 단 한 마디이다. "I'm back".] }}} || 전세계의 농구팬들은 열광했으며, 그렇게 조던은 농구판을 떠난지 정확히 18개월만에 농구 코트에 복귀했다. 단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유니폼 등번호는 ’23번‘이었다며, 조던은 이를 기리기 위해 더이상 23번 유니폼을 입지 않기로 결심했다면서 45번을 달았지만... 그리고 1995년 3월 19일, 조던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했다. 비록 복귀전에서 조던은 19점(FG 7/28, 25.0%)으로 부진했지만, 복귀 후 다섯 번째 경기에서 55점을 폭발시키며 팀 승리를 주도, '농구황제'의 부활을 알렸다. 그래도 그간의 연습 부족과 팀원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아[* 이때 불스의 로스터 중 조던과 오래 뛴 선수들은 스카티 피펜과 B.J 암스트롱, 월 퍼듀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냥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필 잭슨이 자서전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피펜이나 암스트롱, 퍼듀는 조던과 1차 쓰리핏을 함께했기 때문에 조던에 대해 잘 알았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조던의 경기만 봐왔지, 함께 뛴 적은 없었으므로 팀이 막상 위기에 닥쳤을 때 조던만 바라보았다고 회고했다. 물론 조던도 새로운 동료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 이들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올랜도에게 패배한다. 상대 선수가 조롱조로 "23번이 더 나았어"라고 말하자 몰래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까지 했다. 45번 유니폼을 무진장 찍어내었던 리그에서는 재고를 떠안는 사태를 막기 위해[* 물론 이건 당시의 사태일 뿐. 조던이 23번으로 복귀하고 더 이상 발매되지 않게된 45번 유니폼들은 이후 미친듯이 프리미엄이 붙었다.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구하려면 가격대는...] 매 경기마다 천만원대의 벌금을 물렸지만 조던은 꿋꿋이 그걸 입고 나왔다. 하긴 뭐 돈이 모자랄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떡실신당했다. 닉 앤더슨에게 마지막에 중요한 스틸을 당했고, 현역 때처럼 마지막 슈팅 찬스를 맡겼지만 손발이 맞지 않아 날려버렸다. 그러나 동료들과 손발이 안 맞고, 골밑이 휑해진 [* 1차 3연패 당시 골밑을 지키던 센터 빌 카트라이트와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 모두 팀을 떠났으며, 당시 주전 센터는 노화한 카트라이트도 못 밀어내고 백업을 맡던 윌 퍼듀, 그리고 유럽에서 '''가드겸포워드'''였던 토니 쿠코치였다. (쿠코치는 NBA에서 스몰 포워드를 주 포지션으로 삼게 된다).] 상황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다. 당시 불스는 조던 복귀 전까지 34승 31패(52%)로 지지부진하고 있었으나, 조던의 합류 이후 13승 4패 (76%)로 쾌속행진하며 동부 컨퍼런스 5위까지 오른다. 특히 후반부 갈수록 조던이 감을 잡아가며 6연승만 두 차례 거두고, 동부 컨퍼런스의 강호들이던 뉴욕 닉스와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모두 잡는 쾌거까지 올린다. 이 와중에 조던은 닉스를 상대로 올린 55점, 그리고 애틀란타 호크스를 상대로 한 게임위닝 버져비터까지 터뜨린다. 5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안착한 불스의 상대는 떠오르는 젊은 팀 샬럿 호네츠. 그러나 불스는 시드 이상의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고, 1차전을 따내며 샬럿 원정을 1승 1패로 마친 불스는 3승 1패로 호네츠를 정리한다. 조던의 기록은 32.3점 6.5리바운드 5.8어시스트에 야투율 49.7%. 2라운드에서 맞붙은 상대는 동부 컨퍼런스 1위인 올랜도 매직이었는데, 사실 당시 조던은 31점 6.5리바운드 3.7어시스트에 야투율 47.7%로 제 역할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스는 원정에서 열린 1차전 종료 직전까지 1점차로 오히려 올랜도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던은 늘 하던대려 경기 막판에 스스로 공을 몰고 하프라인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공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지 감이 떨어진 그는 뒤쪽에서 접근하던 닉 앤더슨 (올-디펜시브 팀 이력도 없는 평범한 수비수였다)을 못 보고 스틸을 허용했으며, 이를 페니 하더웨이가 재빨리 잡아 하필 전 불스동료 호레이스 그랜트에게 패스, 그랜트가 덩크 슛을 찍으며 역전당한다. 그럼에도 아직 역전의 기회는 있었지만 조던은 자신감을 잃었는지[* 조던도 인간인지라 클러치슛을 놓친 적도 여러번 있지만, 최소한 클러치 순간에 자신감을 잃고 폭탄 돌리기를 할 선수는 아니었다. 3점 슛으로 버저비터를 넣은 적도 있고, 몰려드는 수비 때문에 더블클러치로 던지더라도 항상 자신감 있게 마지막 슛을 던지던 선수였고, 그가 마지막 슛을 양보할 때는 1997 파이널 5차전처럼 아예 전부터 다른 선수가 던지도록 작전을 짰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뚱맞게 슛을 잘 쏘는 것도 아닌 피펜에게 준 건 감을 잃었다는 소리. 사실 95시즌 막판 조던의 기량은 (비록 농구용으로 몸을 만들기 전이었지만) 95-96시즌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8개월동안 농구공을 놓은 영향이 없을 순 없었고 이게 심리적인 악영향을 미친 게 바로 이 플레이.] 갑자기 피펜에게 패스했고, 당연히 조던이 던질 줄 알고 리바운드 참여를 위해 골 밑으로 쇄도하던 피펜이 이를 놓치면서 허무하게 경기가 끝난다. 아무리 조던이라도 18개월의 공백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난 경기.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스는 2차전과 4차전을 승리하며 시리즈를 6차전까지 몰고 갔는데, 상술된 대로 전력이 열세였으며, 주전급 골밑요원조차 한 명도 없었다는것과 상대팀에 올스타급 파워 포워드와 샤킬 오닐이 있었단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객관적 전력의 열세는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 불스가 보여준 저력을 생각하면 1차전 승리 시 업셋도 꿈은 아니었지만 절대적 에이스의 실수는 컸다.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8.118.210.6)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